
잊지않기 위해 기록을 남깁니다.
- <뿌리이야기> 김숨
뿌리가 손을 떠오르게 한다고
나는 언젠가 그에게 고백한적이 있다.
어릴 때 고모할머니가 서너 해 우리 집에 들어와 살았던 적이 있었다. 그녀에게 따로 내어줄 만큼 방이 넉넉하지 않아서
나는 그녀와 한방을 써야 했다.
….
그녀가 슬그머니 내 손을 잡아온 것은, 한방을 쓴지 보름쯤 지나서였다. 팥죽을 먹은 날 밤이었다.
그녀의 손이 이불을 들추고 몰래 파고들어오는 것을
나는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.
내가 깔고 누운 요가 사방이 트인 허허벌판이라도 되는 듯
그녀의 손이 주저하는 것을,
달걀 삶는 시간쯤 뜸을 들인 뒤에야
뜨문뜨문 템포를 고르면서 요 바닥을 더듬어오던 것을,
막상 내 손에 이르자 움찔 경직되던 것을,
냉기가 돌던 그녀의 손가락들이 내 손등을 덮어오던 것을,
깍지를 껴오던 것을….
“깍지를 껴올 때 내 손가락마다 뿌리가 감겨오는 것 같았어, 끈덕지게…”
- <왼손잡이 여인> 김숨
“선천적인 왼손잡이는 아닌 거네?”
그때까지 시선을 딴 데 두고 있던 그녀가
돌연 나를 빤히 응시했다.
그녀의 입은 봉합수술 자국처럼 고집스럽게 다물려 있었다.
초점이 또렷하게 돌아온 그녀의 눈빛에서
원망과 분노, 씁쓸함이 한꺼번에 읽혔다.
결코 질문해서는 안 되는 것을 질문한 듯한,
밝히지 않고 묻어두어야 할 것을 까발린 듯한,
발각당해서는 안 되는 것에 헤드라이트 불빛을 내쏜 듯한
묘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나는 더는 질문 할 수 없었다.
- 김숨 작가님 수상소감
수인이 법정에서 선고받은 실형 기간처럼,
소설을 쓰는 시간은 저를 꼼짝없이 가두는 동시에
저를 해방시켜주었습니다.
마부위침.
당나라 이백이 고향으로 가는 길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드는 노인을 보고 감동해 다시 정진했다는 이야기.
노인의 믿음을 다시금 마음에 새깁니다.
그 믿음으로 도끼를 갈고, 또 갈아 얻은 바늘.
그 바늘로 뜯어지고 해진 양말을 깁듯,
그 바늘로 자투리 천들을 이어 조각보를 만들듯,
그 바늘로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는 만인의 옷을 짓듯,
그 바늘로 삼라만상을 수놓듯, 소설을 쓰겠습니다.
저의 소설 쓰기가 바느질처럼, 업(보)이면서
업을 만들지 않는 일이기를 바라고 바랍니다.
(글이 목소리라면 이선균이네…
수상소감도 감동적이네…. 존경)
- <기도에 가까운> 조경란
어머니에게는 미호가 본 노인들의 한 가지 닮은 점에 관해서 말할 것이다.
그들이 혼자 가끔식 먼 데를 바라보고 있는 걸
뒤에서 본 적이 있었다고.
미호의 눈에는 마치 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 같아 보였다고. 어쩌면 미호에게는 흐르는 강물을 내려가보고 있는 지금이 그러한 순간에 가까울지도 모른다고.
- <흙의 멜로디> 이평재
끈기가 없었다.
거칠고 메말랐다.
버석거리며 먼지가 날렸다.
거기, 까치살모사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.
건드리지 말라는 신호였다.
나는 뗀 발걸음을 어디로 옮겨 놓아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.
한참을 망설이며 주변을 살폈다.
이제 촉촉한 대지로 자비를 베풀던 당신은 없었다.
곧이어 불어온 북풍에 몸이 휘청거렸고, 중심을 잡느라 박혀 있던 나머지 다리마저 땅 위로 뽑혀 나갔다.
밝은 대낮에 선홍빛 생식기가 그개로 노출된 느낌,
나는 한없이 고개가 수그러졌다.
역시 당신은 냉정했다. 화석처럼 굳어 나를 내쳤다.
나의 다리는 부러지고 깨져 피가 흘렀다.
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었지만 눈물이 났다.
- <배회> 손홍규
윤희는 자신의 품에서 헐떡이던 아기가 딱딱해진 걸 알았다.
윤희는 황톳물로 흐르는 탁한 강을 내려가보며
강을 경계 삼아 저 너머 깊은 심연에 가난하고 못생긴 자들이 억압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새로운 세계가 있으리라는
헛된 희망을 되새겼다.
윤희는 두 팔로 그러안은 포대기를 슬쩍 놓았다.
윤희에게 그것은 헬륨 풍선의 엉덩이를 툭 쳐서
저 하늘로 띄워 올리는 행위와 별다르지 않았다.
강은 입을 벌려 포대기째 추락하는 아기를 덥석 받아 삼켰고 그 순간 강 위로 발을 질질 끌며 불어 가던 바람 소리였는지 알 수 없으나 아기 울음이 환청처럼 들려왔다.
그 울음은 앞으로 평생을 두고
윤희의 내부에서 재생될 소리였다.